지상의 양식

타인의 삶_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Jenica 2013. 1. 20. 22:32








어렴풋이 괜찮은 영화라고만 생각하고 있단 타인의 삶. 재개봉한다는 소식에 재빨리 보러 갔다 ㅎㅎ

2006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언제나 그렇듯 줄거리도 자세히 안읽은 상태에서 봐서 더 재미있게 봤다.


(오래된 영화지만 스포 있음 ㅎㅎ)




보면서 남영동 1985가 생각이 났는데, 남영동은 잔혹한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가감없이 표현한 영화라면,

타인의 삶은 그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영화인 것 같다.



주인공이 감시했던 대상이 예술계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삶이 비즐러에게 미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반역자를 잡아낸다'라는 이성의 영역에 시, 음악과 같은 감성이 들어왔을 때의 그 파장.

더욱이 비즐러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왔기에, 허를 찔린 느낌이랄까.


예스카의 죽음을 듣고서 드라이만이 슬픔에 빠져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듣고서 눈물을 흘리는 비즐러.

그러한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감시의 대상을 보호하게 된다.

무자비한 비밀경찰인 그 조차도 가해자인 동시에 국가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두개의 문이 떠올랐고, 개봉한지 6년이 넘은 영화가 지금 재개봉된 것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판 포스터.

HGW XX/7와 지문.




동독의 우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담담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브레히트의 시나, '아름다운 사람을 위한 소나타'와 같은 예술적인 요소들이 중간중간 등장했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술의 힘- 시와 음악과 연극과 글과 그림. 그리고 영화의 힘.

그리고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

대선 전 '정권교체' 선언문 광고를 낸 문인들이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일도 생각났다.

독일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을 때도 느꼈던 건데,

역사는 돌고 돌며, 그 옛날- 동독과 서독이 존재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이 2013년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극장에서 드라이만과 장관이 마주치는 장면에서 

장관이 드라이만에게 왜 글을 쓰지 않냐며, 적이 없어지니 쓸 소재도 쓸 말도 없는 것 아니냐며 그때가 좋았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다니.. 아 듣기만 해도 화나 ㅎㅎㅎ




크리스타가 죽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핑 돌긴 했지만,

이 영화의 최고의 장면은 마지막 장면. 그냥 눈물이 후두둑 하고 떨어지더라 ㅎㅎ

자신을 보호해준 비밀경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보지만, 멀리서 보기만 하고 그냥 떠나는 드라이만.

그 순간에 다가가 말을 걸어 고마움을 표할 수도 있었겠지만, 예술가인 드라이만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전한다.

비즐러가 마음을 돌리게 된 큰 계기가 예술이었기에, 

이런 드라이만의 표현은 비즐러에게 있어서 그 어떤 말이나 보상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HGW XX/7로써 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겠지만, 자신의 삶이, 용기를 가지고 바꿔냈던 그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그 또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독일, 특히 베를린을 여행할 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잊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시설로 기록을 해놓았던 모습을 보며

전범국가임에도 독일이 선진국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에서도 이런 독일의 시스템이 나오더라. 

역사를 잊지 않은 국민에게는 미래가 주어지는 법이니까.




1월 1일에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나서 딱히 땡기는 영화가 없어 한동안 안보다 본 영화인데,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