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숙녀 여러분,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서두르세요, 얼른요. 늦춰지는 게 싫으시죠? 앉아서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고 놀랄 준비를 하십시오. 여기 여러분을 즐겁게 해주고, 교훈을 주고, 만족시켜주고, 덕성을 높여줄 쇼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평생 기다려오신, 지상 최고의 쇼입니다! 기적을 보실 준비가 됐습니까? 됐다구요? 그럼 좋습니다. 어디서든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춥고 눈 덮인 숲에서도 봤습니다. 비 내리는 무더운 밀림에서도 봤습니다. 잡목이 덮인 건조한 땅에서도 봤습니다. 홍수림 지역의 소금이 있는 습지에서도 봤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어디서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생전 처음 보시는 것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어린이 여러분, 더이상 떠들어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게 되어 기쁨이자 영광입니다. 인도계 캐나다인 파이 파텔, 태평양을 건너는, 물에 떠 있는 서커스으으으으! 휘리릭! 휘리릭! 휘리릭! 휘리릭! 휘리릭!"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판타지 내지는 성장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일 거라고 생각해서 시도도 하지 않았던 책인데,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서 "이건 봐야해!"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게 되었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함께하는 지상 최고의 이야기.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곤 하지만, 정말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동물과 함께할지언정.
나는 신을 믿는다.
문화원의 보조금이 없었다면....
시민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상상력은 극악한 현실의 제단에 희생될 것이다.
결국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고, 쓸모없는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 가톨릭 신자처럼 태어난다. 그렇지 않은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종교도 없이 그렇게 있다가 누군가에 이끌려 신을 소개받지 않는가. 대개 그 만남 이후 이 문제는 끝이 난다. 변화가 있다 해도, 사소한 변화다. 많은 사람이 인생여정을 따라가다가 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내 경우는 달랐지만.
마지막 날, 문나르를 따나기 몇 시간 전, 나는 왼쪽 언덕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서두르는 것은 전형적인 기독교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급히 서두르는 종교다. 이레 만에 창조된 세상을 보라.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창조는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한 영혼을 위한 싸움도 수세가 넘게 여러 대에 걸쳐서 계속될 수 있는 종교 속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기독교의 빠른 해결은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힌두교가 갠지스 강처럼 표표히 흐른다면, 기독교는 토론토의 출퇴근 시간처럼 부산스럽다. 한순간 탕아가 되거나 구원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쭉 뻗쳐 있기는 하지만, 그 정수는 한순간에 존재한다. 지금 당장.
이슬람교란 단지 쉬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두인족이 하는 뜨거운 날씨 속의 요가. 힘들이지 않고 천국에 가겠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슬람 교인이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빠르고, 필요한 동작만 하고, 육체적이고, 중얼거리며, 놀라웠다.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십자가의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꼼짝 않고 조용히 기도하는-밀가루 부대에 둘러쌓여 체조를 하면서 신을 영접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아저씨의 종교는 어떤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지."
그가 대답했다.
이슬람 사원은 신에게, 또 바람에게 열린 구조였다. 우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맘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기도시간이 되면,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줄을 맞춰 섰다. 한 군데도 빈 자리 없이 신도들을 앞뒤로 반듯하게 줄을 맞췄다. 이마를 땅에 대면 기분이 좋았다. 금세 깊은 신앙에 접한 느낌이 들었다.
한번은 시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갑자기 지대가 높아지면서 왼편과 길 아래 멀리까지 바다가 보였다. 그 순간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도 지났던 장소였지만,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었다. 분출하는 에너지와 깊은 평화가 묘하게 뒤섞인 느낌은 강렬하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그 길을 지나기 전에는 바다와 나무들, 공기, 햇살이 저마다 다르게 말했지만, 이제 모두 하나의 언어로 말을 걸어 왔다. 나무는 길을 안내했고, 길은 공기를 인식했고, 공기는 바다를 생각했고, 바다는 햇살과 모든 걸 나눴다. 모든 요소가 이웃해서 조화를 이루었고, 모두 친척이 되었다. 나는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으로 무릎을 꿇었고, 영원불멸의 존재로 일어났다. 작은 원의 중심이 된 듯했고, 우연히도 그 원은 훨씬 큰 원의 중심인 느낌이었다. 자아가 알라와 만났다.
그와 만날 때마다 난 시무룩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게 내 삶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그의 어떤 말이 나를 흔들었을까? 아, 그렇다. '메마르고, 누룩 없는 사실주의' '더 나은 이야기'. 펜을 들고 종이를 꺼내 글을 쓴다.
성스런 의식의 언어, 도덕의 찬미, 고결함과 의기양양함과 환희의 여운, 도덕관념이 되살아나 사물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다. 우주를 도덕적인 선을 따라 정돈한다. 존재의 기본원칙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지만, 때로 명확하지 않고, 분명치도 않고 즉각적이지도 않다.
나는 잠시 멈춘다. 신의 침묵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긴다 덧붙여 쓴다.
혼란스런 지성이지만 확실한 존재감과 궁극적인 목적의식.
무신론자들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상상할 수 있다. "하얗군, 하얀색이야! 사-사-사랑! 아, 하느님!" 죽으면서 믿음이 생긴다. 반면에 불가지론자들이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메마르고 누룩 없는 사실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면, 몸을 감싸는 따스한 햇살에 "뇌-뇌-뇌의 산소가 부-부족하군"이라고 하리라. 마지막까지도 상상력 부족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놓치고 말겠지.
왜 사람들은 이동할까? 무엇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모르는 게 없던 곳을 떠나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로 향할까? 왜 스스로를 거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겉치레투성이인 곳에 오르려고 할까? 왜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힘겨운 이국의 정글로 들어갈까?
어디서나 대답은 하나겠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이주한다.
우리는 얼룩말이 있는 곳으로 갔다. 쿠마르 씨는 얼룩말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이런 동물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얼룩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붓으로 색칠을 한 건가?"
"아뇨, 아니에요. 원래 저렇게 생겼어요."
"비가 오면 어떻게 되지?"
"아무렇지도 않죠."
"줄무늬가 번지지 않아?"
"아뇨."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사랑한다!"
터져나온 그 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예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