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_김기덕

(영화보다 다른 얘기가 더 많은 후기 ㅋㅋ 스포 없음!)

 

 

 

올해에 봤던 영화 중 '케빈에 대하여'가 가장 좋았는데,

그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영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이전 영화와의 비교는 못하겠지만,

다른 영화에 비해 많이 순화된? 영화라고들 하더라 ㅎㅎ

 

조민수의 연기가 정말 좋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배경음악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먹먹한 상태로 나왔던 영화.

 

'신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의 피에타.

등장인물 모두가 피해자다.

악행을 일삼는 주인공 조차도.

그의 기저에 있는 엄마에게 버림 받았다는 결핍.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가-100%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지만- 택할 수 있는 삶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철거 예정인 지역에서 몇 십 년 간 일을 해온 노동자들.

그들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 또한 많지 않다.

 

 

 

 

 

영화를 보며 최근논란이 되었던 학교폭력 사항을 학생부에 기재하느냐,가 떠올랐다.

이와 함께 성폭행에 가담했던 학생이 봉사왕으로 모 대학에 입학했던 사실이 밝혀졌던 사건도 생각났다.

지금 찾아보니 학교에서 조사에 착수한다,는 게 마지막 기사네.

 

처음엔 나도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잘먹고 잘 산다는 것이-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간다는 것은 '잘'살기 위한 중요한 지표니, 아무런 표시없이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반대 입장에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재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 기재를 반대하는 쪽의 문제 인식은 합당한 처벌을 넘어 왜 그것을 학생부에 기재함으로써 평생 낙인을 찍느냐이다. 이는 이중 처벌, 과잉 처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 이들에게 낙인을 찍음으로써 파생될 수 있는 우려스러운 일은, 일차적인 학교 폭력자가 학생부 기재 이후 학교폭력 전력자가 되어 이차적인 일탈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긴장이론에 따르면, 합법적인 기회(대학 입시와 취업)가 박탈되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이 사라짐으로써 그 청소년은 비합법적이고 일탈적인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기재 찬성론자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이차적 일탈자는 우리 사회에서 벗어나 사는 것이 아니고, 항상 감옥에 격리되어 있는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 사회 속에서 이웃으로 사는 사람들이며, 많은 시간 감옥 밖, 우리 곁에서 사는사람들이다.

 

'폭력 학생' 낙인이 더 큰 폭력 만든다, 김천기(전북대 교수,교육학), 시사인 261호

 

 

영화에서 주인공 강도의 어린시절이 나오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어디선가 조금 비뚤어지기 시작했고,

그 때 그의 곁에서 이 길이 잘못된 길이라며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범죄자를 구별해내겠다며 낙인을 찍는다면, 당장은 피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더 많은 범죄자들이 존재하게 되며,

그들이 반성해서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을 막는 것이 된다.

영국의 경우에도 계층 사회이기 때문에, 하위 계층에 속하는 아이들은 그 삶에서 더 나아질 기회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그냥 그렇게 놓아주자는 것은 아니다.

죄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내리고, 그 학생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봉사왕으로 입학한 그 학생의 경우에도,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해 가벼운 벌을 받았기에 학생부에 기재 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관해 취재를 한 친구에 말에 따르면, 이미 학생부에 기재를 하는 규정이 존재하는데, 

그 기준은 '사건'이 아니라 '처벌'의 수위에 따라 정해진다고 한다.)

사회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기재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근본적으로 사회가 정의롭게 돌아가도록, 법을 만들고, 집행을 해야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 일반 시민이 얼마나 제대로 된 국회의원을 뽑아내느냐,로 귀결된다.

지금의 이런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법이나 제도는,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들에 의해 발의되고 고쳐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조금 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한 홍성수 교수님께서도 글을 쓰셨던데, 일부 발췌해봤다.

다양한 사안에 대해 쉽게 글을 쓰셔서 좋다 ㅎㅎ

 

 

- 언론과 정치권이 사태를 이렇게 수습하고 나서야 국민은 안심한다. 그놈 면상이라도 봤으니 속이 시원해졌고, 분 단위로 자세히 묘사된 범죄 보도를 보며 욕을 퍼부었더니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정치인들도 경쟁하듯 나서서 범죄자들에게 전자 발찌를 채우고 거세까지 해준다고 약속하는 걸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 시민-언론-정치의 절묘한 '삼각 연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몇 년 동안 반복해서 보았던 이 익숙한 풍경의 결과는 어땠을까? ... 삼각 연대는 사회를 안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삼각 연대의 최대 피해자는 '안전한 사회'를 원했던 시민이다.

 

- 범죄학은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이 범죄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지적해왔다. 가장 효과적인 형사정책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 매번 '한가로운 소리'라고 타박받으며 뒷전에 밀렸던 그 '근본 대책'들의 이행을 요구하자. 범죄사건을 보며 느꼈던 분노의 에너지를, 딱 그 절반만이라도 사회정책에 돌려보자. 필요한 사회정책들의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매년 분기별로 이행 현황을 점검해가며 딱 10년만 끈질기게 따져 물어보자.

 

- 오로지 시민만이 그들의 그 불온한 연대에 파열구를 낼 수 있다.

 

괴물을 없애는 방법,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조교수), 시사인 261호

 

 

 

만약 주인공 강도가 한 번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 제대로 교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렇게 잔인한 어른이 되었을까?

청계천의 공장에서 일하던 이들에게도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갚기 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채를 선택했을까?

 

 

범죄자들에게 돌을 던지기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범죄가 생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함께 잘,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